2011년 3월 31일 목요일

귀국 이사물품 통관안내 및 운송 피해사례 전파

 


 

[*] 귀국 이사물품 통관안내 및 운송 피해사례 전파

 

아래는 대사관 공지 사항입니다.

 

- 아래 -

 

귀국 이사물품 통관안내 및 운송 피해사례 전파

□ 이사자와 이사물품 정의

● 이사자 - 우리나라로 주거이전 목적으로 입국하는 자로서

■ 우리나라 국민 : 외국에서 1년 이상 거주한 자

■ 재외영주권자 : 영주귀국자 또는 우리나라에서 1년 이상 거주할 자

■ 외국인(외국국적 동포 포함) : 우리나라에서 1년 이상 거주할 자

※ 준이사자, 단기체류자에 대해서는 관세청 홈페이지 참조

● 이사물품

■ 이사자 본인이 입국시 휴대 또는 별송으로 반입하는 물품 중 체류자 직업, 기간, 목적 등으로 보아 세관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물품 등

□ 이사물품으로 적합하지 아니한 물품

■ 타인물품(타인의 의뢰를 받아 반입하는 전체 물품)

■ 개인용 또는 가정용으로 적합하지 아니한 물품(파이프 오르간 등) 등

□ 면세․과세 물품

● 면세대상 물품

■ 이사자 또는 준이사자 본인, 동반가족이 해외 거주시 3개월이상 사용한 물품

■ 이사물품 등 요건을 충족한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국산자동차(단기체류자가반입한 국산자동차는 과세) 등

● 과세대상 물품

■ 선박․항공기

■ 보석, 진주 등과 이를 사용한 제품으로 개당 과세가격이 200만원 이상인 것

■ 자동차(이륜자동차는 배기량 50cc이상)

■ 이사자 등 또는 그 동반가족이 해외에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에 입국하기 전3월 미만 사용한 물품 등

☞ 과세대상 물품 중 자동차 세부내용

● 이사물품자동차 인정요건

■ 승용자동차(10인승 이하) 또는 이륜자동차(50cc이상)

■ 전거주지에 등록하여 3월이상 경과한 자동차

■ 전거주지에서 이사자 등 및 그 동반가족이 동일 세대를 구성한 가구당 1대의 자동차

■ 이사자 등 입국일부터 6개월 이내 국내 반입

● 이사물품 자동차 과세가격 및 세액결정

■ 선적지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자동차가격에 관한 책자에 게재된신차가격(List Price)을 기준(다만,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실제구입가격 제시시 제시가격 인정)

- 과세가격 : 동 신차가격(List Price)에서 최초등록일 이후 수입신고일까지의사용으로 인한 가치감소분을 공제한 후 운임 및 보험료를 포함한 가격

■ 총 세율은 2,000cc 초과시 과세가격의 34.24%, 2,000cc 이하시 과세가격의 26.52%

□ 이사물품 운송 관련 피해사례 전파 및 주의사항

이사물품 운송과정에서 운송업체의 고의 부도 또는 연락두절로 인해 이사자가 운송비를 이중으로 지급하거나, 짐을 찾지 못하는 피해사례가 발생. 이사물품 운송업체를 선정할 경우, 신뢰도가 높고 신용있는 업체를 선정하여 주시고, 운송관련 계약서를 작성하실 경우 꼼꼼히 점검하여 주시길 당부드림

* 본 내용은 개괄적인 사항으로서 세부사항 및 정확한 규정을 안내받으시려면 관세청 홈페이지(해외 이사물품) 및 관세청 고객지원센터로 직접 확인바람

* 관세청 홈페이지 : www.customs.go.kr(“통관정보의 문>해외 이사화물” 활용)

* 서울세관 홈페이지 : www.customs.go.kr/seoul

* 관세청 고객지원센터(국내 1577-8577, 국외 02-3438-5199)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필리핀 역사 속의 인물] 필리핀 독립 영웅 아귀날도. 필리핀 초대 대통령


 

[*] [필리핀 역사 속의 인물] 필리핀 독립 영웅 아귀날도. 필리핀 초대 대통령

 

image 스페인과 미국에 대항한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 29세에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후 미국의 점령에 저항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1964년 95세로 타계할 때까지 필리핀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다.

 

1869년 오늘, 필리핀 카비테주 카윗의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리오 아귀날도는 16세 때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독립무장단체에 가입했다.

그러나 2년 후 보니파시오 그룹이 스페인 군대를 공격하려 하자 아귀날도 그룹은 전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고 보니파시오는 패배했다. 아귀날도는 이후 중심 인물로 부상했고 지도력을 잃은 보니파시오를 제거했다.

 

아귀날도는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을 내쫓은 뒤 1897년 필리핀 초대 대통령에 취임, 세금, 교육, 의료 등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2년 뒤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졌고 아귀날도는 이에 저항했으나 1901년에 체포된다.

미국이 점령한 체제에서 은퇴했던 아귀날도는 193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누엘 퀘존에게 아깝게 패한다.

필리핀은 미국에 이어 일본의 점령 하에 있다가 일본 패망 다음해인 1946년 독립한다.

아귀날도는 이후 국가 원로로서 각종 공직을 거쳤으며, 사후 21년 뒤 5페소 지폐의 주인공이 된다.

 

 

 


 


2011년 3월 21일 월요일

[필리핀 대사관 공지] 필리핀 사건 사고 관련


 

[*] [필리핀 대사관 공지] 필리핀 사건 사고 관련

1. 주필리핀대사관(대사 이혜민) ․ 한인총연합회(회장 이원주)는 3. 18(금) 오전 필리핀 경찰위원회 대회의실에서 Robredo 필리핀 내무부장관, 경찰위원회 위원, 경찰청 간부들과 함께 ‘한인사건종합대책회의’ 3차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동석자 : 대사관측 김용호 공사겸총영사 및 영사 4명, 한인회측 이종섭 수석부회장, 이민호 부회장, 황일원 남부한인회장, 정의권 중부루손한인회장, 정재열 마카티 지회장, 홍성준 파식/올티가스 지회장, 최상구 안티폴로 지회장, 양희준 카비테 지회장 등)

2. 우리측은 이 자리에서 한인 안전 문제를 전담하기 위해 지난 해 경찰청에 설치된 Korean Desk를 통해 대사관/한인회와 필리핀 경찰당국간 긴밀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평가하고, 향후 지역 경찰청에 지역 한인회와 연계되는 ‘한인특별연락소’(Special Liasing Post for Korean)를 설치하여, 한인 안전 문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경찰청에서 지역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 세미나’를 개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3. Robredo 장관 등 필리핀 치안당국에서는 지난 해 말 관광 경찰대(Tourist Police, ‘Bantay Turista')를 창설, 국내 14개 주요 관광지에 배치하고, 공항 주변 및 고속도로에 대한 순찰 강화 등 필리핀 방문객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한인이 필리핀 전체 관광객의 20%를 상회하고 투자와 사업파트너로서 필리핀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높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한인 관련 사건에 대하여 법무부 등 모든 관계 부서와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키로 하였습니다.

4. 필리핀 치안당국은 또 최근 빈발하고 있는 수면제 약물 강도(Ativan gang) 범죄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우리측 요청에 대하여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

5. 4차 회의는 오는 6월 중에 대사관 주최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3월 21일 필리핀 지진

 

[*] 3월 21일 필리핀 지진

한국 시간 약 7시 30분 경에 필리핀 전역에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


 



2011년 3월 20일 일요일

김규열 선장님 도우미 일지


 

[*] 김규열 선장님 도우미 일지

 

출처 : 필고 http://philgo.com
글쓴이 : 송재호
연락처 : thruthesky@gmail.com

 

1 장. 김규열 선장님(이하 김규열씨로 호칭) 에 대한 사건 개요

 

- 서문 -

본 글은 필리핀의 교도소에 억울하게 갇혀서 1년 이상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한 체
방치되어 있는 김규열 선장님에 관한 글입니다.

본 글에서 "억울하"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김규열 선장님이 죄가 있으면 재판에서 판결을
하면 될 것인데, 과거 5년간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갇혀 있다가 무죄로 풀려난
조중사(조광현 님)처럼 장기간 교도소에서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으며 갇혀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2011 년 1 월 22 일 현재 김규열씨 선장님은 마닐라 시티젤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2009년 12월 필리핀에서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필리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최근(2010년 12월 말)까지 3차례의 공판이 진행된 상황입니다.

김규열씨의 문제는 2011년 11월 말 경에 교민 사회에서 알려져서 2011년 3월 현재 까지

의견이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번 째 의견은 김규열씨가 범죄인이 맞다는 의견입니다.

PDEA 에서 제시하는 모든 서류와 근거 자료가 정확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이 김규열씨는 마약 범죄를 저지른 중죄인이라는 것입니다.

(PDEA 는 Philippine Drug Enforcement Agency 약자로서 필리핀 마약청입니다.)

두번 째 의견은 완벽한 조작이라는 것입니다.

마약 혐의로 3년 반 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다 2007 년에 불려난 방기일 씨나

살인 혐의로 5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다 풀려난 조광현 씨와 같이

모든 증거 자료는 완벽한 조작이라는 것입니다.

그 들은 처음 김규열씨를 체포 했을 때, 돈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증거 자료가 사실이든 거짓이든 재판을 하면 무조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며

또 실질적으로 김규열씨 구명 운동을 진행하는 분들의 의견입니다.

해결 책은 보석을 통해서 김규열씨가 밖으로 나오는 것과 김규열씨를 잡아 넣은 PDEA 단속반과 합의를 하는 것입니다.

보석으로 김규열씨가 나와서 자신을 잡아 넣은 PDEA 단속반과 합의를 하면 좋고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PDEA 단속반과 합의를 본다는 것은 죄가 없는데 잡혀가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에 대해서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함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김규열씨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하더라도 자유의 몸이 되면 조용히 참고 살아가는 것과

한국으로 돌아가 국제 재판을 통해서 필리핀에 국가와 정부에 소송을 거는 걸어 해당 부정 마약 단속반의 처분과 필리핀의 외국인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알리는 것 등의 선택은 김규열씨가 택할 문제입니다.

 

 

2장. 인물안내

 

a) 김규열

김규열씨는 2009 년 12 월 17일 마약 소지 혐의를 덮어쓰고

억울하게 끌려가 돈을 주지 않자 필리핀 마닐라 시티젤 교도소에 갇혀 유죄, 무죄

판결도 없이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갇혀서 방치 되어있습니다.

필리핀 교민 및 대한민국민의 염원은 김규열씨가 무죄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시간내에 제대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b) 구정서

조광현씨가 교도소에서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한 체 유죄, 무죄 판결도 없이

5년간 갇혀 있을 때 무죄 석방이 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신분입니다.

2010년 12월 중순 이후 대한민국 언론에 김규열씨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제보하여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도록 불씨를 만들어 낸 분입니다.

 

c) 한나현민 (본명: 방기일)

필리핀 교도에서 억울하게 3년 반 동안 갇혀 있다가 2007년 풀려나신 분으로

김규열씨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 김규열씨 석방에 힘을 쓰고 있는 분.

 

d) 김창규

딴지일보 기자로서 김규열씨 사연을 가장 먼저 기사화 하고 누구보다 앞장서

김규열씨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

다음 아고라에 이슈청원과 모금청원을 시작.

 

e) 조광현

살인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5년 동안 무죄, 유죄 판결도 없이 갇혀 지내다가

2010년 말에 출소한 분으로 필리핀 마닐라 시티젤에 갇혀 있을 당시 김규열씨와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부조리한 필리핀의 실태를 잘 알고 있으며 필리핀 교도소의 어려운 생활을

잘 알고 있습니다.

 

 

3장. 김규열씨 호소문

《대 한민국 나에 조국에 살고계신 국민 여러분께 올립니다》호소문에서 직접 밝힌 본인의 신상정보

성명 : 김 규 열 Kim Kyu Yeol 생년월일 : 1960년 8월 20일
주민번호 : 600820 - XXXXXXX 본적 : 전남 여수시 종화동 1111-7호
가족관계 : 없음 (5년전 이혼함)
학력 : 전라남도 여수동 국민학교 졸업, 여수동중학교 (11회)졸업, 여수 수산 고등전문학교 (현재 여수대학교) 항해과 (12회) 학번 55회 졸업
승선경력 : 해상생활 선박근무 25년, 직책 ~ 선장으로 17년 근무

호소문 전문: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63588&page=1&cafe_id=kim&category=

 

 

4장. 사건 일지

 

2009년 12월 17일 오후 3시경
필리핀 마닐라시에 위치한 하리손 플라자 내에 위치한 "차오킹"이란 식당에서 식사를
사가지고 나오자 마자 3명이 김규열씨를 강제로 끌고 봉고차에 태웠음.
봉고차에는 총 3명이 더 있었고 총 6명이 김규열씨를 PDEA (마약 단속국)으로 데리고 갔다.
얼마 후 경찰들이 사건 조작을 하였는데, 김규열씨가 소지하지도 않은 마약과 돈 뭉치 등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김규열씨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규열씨가 반항을 하자 많은 구타를 했으며 권총을 머리에 대고 협박을 했다.

2010년 1월 27일
PDEA 에서 40여 일간을 보내고 2010년 1월 27일 오전 일찍 마닐라 시티젤(교도소) 이송 후
6호 감방에서 현재까지 지내고 있다.
김규열씨는 이 때까지도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 몰랐으며 나중에서야
마약과 관련된 "섹션5"(마약 소지 또는 운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2010년 8월 29일 일요일
호소문 작성 : "대한민국 나에 조국에 살고계신 국민 여러분께 올립니다"

2010년 12월
구정서씨가 김규열씨의 사연을 국내 언론에 제보함으로서
"김규열 선장님 구출작전"이라는 불씨가 발생.

 

 

5장. 도우미 일지.

 

2010년 12월 18일

구정서씨의 메일을 통해 조광현씨가 쓴 호소문이 딴지일보 전달 됨.
내용은 필리핀 감옥에서 5년간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불법감금되었던
조광현씨(한국에서는 조중사 사건으로 알려짐)가 12월 17일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메일은 그동안의 사연과 함께 다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호소로 끝을 맺는다.
이 메일은 딴지일보를 포함한 각 언론사로 제보되었다.

- 발췌 - 딴지일보 http://www.ddanzi.com/news/54659.html

 

 

2010년 12월 20일 전후,
  구정서씨가 김규열씨에 관한 억울한 사연을 대한민국의 언론에 호소
http://www.newsdream.co.kr/mybbs/bbs.html?mode=view&bbs_code=request&cate=report&page=&search=&keyword=&bbs_no=121767

 

 

2010년 12월 22일 밤 부터 23일 새벽 까지 전화 인터뷰
  딴지 일보 김창규기자와 구정서씨, 조 광현씨가 인터넷 전화를 통해 김규열씨와 관한 문제로 인터뷰
  김규열씨가 교도소에서 쓴 편지를 스캔하여 딴지 일보 김창규 기자에게 전달.

 

 

2010년 12월 24일
  딴지일보에 김규열 선장의 억울한 사연이 기사화. 이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게 됨.
  필리핀에서 김규열 선장이 죽어가고 있다
http://www.ddanzi.com/news/53651.html
  딴지일보 김창규 기자가 다음아고라 이슈청원 시작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101780

 

 

2010년 12월 25일
  많은 분들이 외교통상부에 김규열씨에 대한 진상 조사를 위한 항의글을 올리게 됨.
  외교통상부가 김규열씨에 대한 조치 사항을 홈페이지에 게제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63734&page=1&cafe_id=kim&category=

 

 

2010년 12월 26일
  오마이뉴스 신문에 기사화
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21489&section=sc1&section2=%BB%E7%C8%B8

 

 

2010년 12월 27일
  딴지일보 김창규 기자가 필리핀교도소에 갇혀있는 김규열씨와 통화
  딴지일보에 후속 기사가 발표 - 김규열선장 사건의 진실은?
http://www.ddanzi.com/news/53831.html
  이후 많은 인터넷 신문에서 기사화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63732&page=1&cafe_id=kim&category=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64636&page=1&cafe_id=kim&category=

 

 

2010년 12월 29일
  필고 운영자 송재호, 김규열씨에 대한 사연을 한 겨레에 기사 제보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65037&page=1&cafe_id=kim&category=

  12월 29일 저녁에 대사관에서 교도소에 있는 김규열씨에게 생필품을 전달

 

 

2010년 12월 31일
  오마이뉴스에서 기사발표
http://school.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00260

 

 

2011년 1월 초
  국내의 수 많은 언론에서 기사 발표.

 

 

2011년 1월 5일

  지난 1월 5일, 외교통상부는 김규열 선장 사건과 관련하여 '마약소지 혐의로 필리핀에 수감중인 우리국민(김○○씨)관련 외교부 조치 내용입니다.(외교통상부 원문 링크)' 라는 제목의 두 번째 공지문을 올렸다
http://www.mofat.go.kr/incboard/freedetail.jsp?txtBoardId=F0005&txtBoardSeqNo=58002&txtCurrPage=1&txtLineNo=10&txtSerItem=&txtSerStr=

 

 

2011년 1월 6일
  필고에서 아고라 이슈 청원 서명 운동을 진행
http://w9.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reminder&idx=68738&page=1&cafe_id=&category=
  김규열씨 관련 연합뉴스 기사 발표
  김규열씨 관련 뉴시스 기사 발표

 

 

2011년 1월 7일
  딴지일보에 모금 청원에 관한 기사 발표
  김규열 선장 모금 청원 - 우리 스스로를 구하자
http://www.ddanzi.com/news/54659.html
  딴지일보 김창규 기자가 다음 아고라에 모금 청원을 시작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donation/view?id=102220

 

2011년 1월 11일
  방기일(필고 회원 닉네임: 한나현민)씨와 구정서씨, 조광현씨가 마닐라 시티젤 교도소에서 김규열씨 면회.
  장충동 족발 식당에서 음식을 제공

 

2011년 1월 12일
  구정서씨가 필고 카페에 김규열씨에 관한 서류 정보 글 등록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72144&page=1&cafe_id=kim&category=

 

 

2011년 1월 15일
  필112 교민보호 단체에 구정서씨와 조광현씨가 참석하여 김규열씨의 문제에 대해서 의논. 필112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

 

 

2011년 01월 18일
  "일요서울신문사"에서 김규열씨 관련 기사 발표
http://www.ilyoseoul.co.kr/show.php?idx=88424&table=news_society&table_name=news_society&news_sec=024

 

 

2011년 2월 2일
  구정서씨, 마닐라 시티젤의 교도소로 김규열씨 면회.
  장충동 족발집에서 음식 제공.

 

 

2011년 2월

  다음 아고라 청원 거절.
  보석금에 대해서는 청원이 될 수가 없음.

 

 

2011년 3월 9일

  필고 회원 "불그XX" (김문X) 님을 비롯한 몇 몇 분들이 필고 운영자 송재호씨에게
  김규열 선장님을 위한 모금 운동을 진행하자고 전화로 요청을 해 와서,
  구정서님과 상의를 하여 모금 운동에 관한 계획을 세우고 시행을 할 수 있도록 검토를 함.

 

 

2011년 3월 12일

  구정서씨가 김규열씨 면회.
  장충동 족발에서 계속해서 교도소에 갇히 김규열씨를 위해 음식을 제공하고 있음.

 

 

2011년 3월 14일

  김규열 선생님을 위한 모금 운동 시작.
  모금 금액은 구정서씨가 관리.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110051&page=1&cafe_id=kim

 

 

2011년 3월 30일

  김규열씨 재판 예정.
  국선 변호사를 통해 그냥 형식적인 재판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 됨.

 


 


김규열 선장님을 위한 모금 운동


 

[*] 김규열 선장님을 위한 모금 운동


 

image

김규열 선장님(이하, 김규열씨)에 대한 문제가 교민 및 한국 사회에 알려진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필고 회원 님 중에서 몇 몇 분들이 김규열씨를 위해 기부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이 때 마다 다음 아고라에서 모금 청원을 준비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얘기를 드려왔으나,

보석금 마련을 위한 모금 청원은 성사될 수 없다고 하여 다음으로 부터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따라 아래와 같이 모금 운동을 진행합니다. 3월 9일 부터 시작되었으며 몇 몇 분들이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1. 모금 금액은 구정서씨가 맡아서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2. 모금되어진 금액은 모두 김규열씨를 위해서 쓰여지며

3. 100% 영수증 처리를 원칙으로 합니다.

영수증 처리를 할 수 없는 곳에는 모금액을 쓰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단, 김규열씨에게 직접 전달 되는 금액은 제외)

4. 금전이 아닌 물품 지원도 받습니다. (참고로 모 식당에서 김규열씨 면회를 갈 때마다 꾸준히 음식 제공을 합니다.)

5. 익명 후원도 가능하지만, 되도록 입금 후 게시판에 글을 써 주시면 좋습니다. (입금할 때, 통장에 입금자명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금 통장 안내 : 3640149559 Metro Bank Jungseo Ku

 

 

[*] 김규열 선장님에 대한 안내

 

필고 "김규열 선장님 구출 작전" 카페에서 보다 많은 내용을 확인을 할 수 있습니다.

 

http://cafe.philgo.com/?cate=post_in&action=view&id=cafe_kim&idx=110056&page=1&cafe_id=kim&category=

 

 

 

 


 


2011년 3월 16일 수요일

리잘 공원(Rizal Park)


 

[*] 리잘 공원(Riz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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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국민적 영웅 호세 리잘(Jose Rizal)을 기리는 공원으로 마닐라만 근교 로하스 거리에 있다.

스페인 식민정책에 항거하던 리잘이 1896년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공원 입구의 리잘 기념탑 앞에서 무장한 헌병이 이곳을 지킨다.

기념탑 뒤에 그가 죽기 직전 조국 필리핀을 위해 남긴 시 "나의 마지막 고별(Mi Ultimo Adios)"이 세계 주요 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공원 내부는 '마닐라의 허파'라 할 만큼 숲이 무성하고 정원이 잘 가꾸어진 휴식공간으로 시민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말에 야외강당에서 콘서트가 열리고 북동쪽 부르고스 거리(P. Burgos Street)에 구석기시대의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이 있다



마닐라 대성당


 

[*] 마닐라 대성당

산티아고 요새를 가로질러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마닐라 성당에 이른다.

1581년 건축된 후 화재, 지진으로 손상되어 6차례에 걸쳐 개보수되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우아한 석조술을 엿볼 수 있다.



마닐라 산티아고요새(Fort Santiago)


 

[*] 마닐라 산티아고요새(Fort Santiago)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북서쪽에 위치한다.

에스파냐 군대의 본부였고 호세 리잘(José Rizal)이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던 곳이다.

파시그강(Pasig River) 하구가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일본군 점령기 동안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되었던 많은 부분을 1950년대에 복구해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특히 요새 입구의 성벽을 정교하게 복원하였다.

스페인 시대에는 필리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으며, 오직 부역자들이 낮 동안 성 안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다 저녁에 성문 밖으로 쫓겨나곤 하였다.


코레히도르섬(Corregidor I.)


 

[*]코레히도르섬(Corregidor I.)

면적 5km2, 최고점은 194m이다.

바위가 많고, 북쪽의 바탄반도와 너비 5.7km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닐라 방위의 요충을 이룬다. 18세기에 에스파냐가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20세기 후로는 미군의 군사 기지로 강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1942)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공방전 끝에 일본군이 점령하였으나, 1945년 2월 미군이 필리핀 반격작전에 의하여 재탈환하였다. 전적지(戰跡地)로서 관광의 대상이 된다.



히든밸리(Hidden Valley)


 

[*] 히든밸리(Hidden Valley)

마닐라 근교에 위치한다.

수정같이 맑은 폭포수와 샘물, 온갖 꽃과 나무,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은밀한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킬링산 위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지하에서 솟아나오는 맑은 샘이 천연 풀장을 만들고 있으며 우거진 숲 사이로 만들어진 오솔길은 삼림욕을 즐기기에 알맞다.

관광명소로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팍상한 폭포 (Pagsanjan Falls) 또는 마그다피오폭포(Magdapio Falls)


 

[*] 팍상한 폭포 (Pagsanjan Falls) 또는 마그다피오폭포(Magdapio F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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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다피오폭포(Magdapio Falls)라고도 한다. 소도시인 파그산한의 국유지에 위치하며 높이는 91m이다. 주도(州都)인 산타크루스에서 가까우며, 마닐라에서 남동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다. 900m 아래쪽에 있는 탈라히브폭포(Talahib Falls)에서 배를 타고 깊은 계곡을 지나 한 시간 정도 가면 나온다.

폭포 바로 뒤쪽에 있는 악마의 얼굴 모습을 한 악마동굴(Devil's Cave)에 들어가면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거대한 용소(龍沼)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으며, 최근 들어 필리핀의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나용 필리피노(Nayon Pilipino)


 

[*] 나용 필리피노(Nayon Pilipino)

마닐라국제공항 옆에 위치하는 필리핀의 민속촌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Philippine Villlage라고도 한다.

45㎡의 초지 위에 필리핀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재현해 놓은 곳이다. 필리핀을 대표하는 6개 지역의 생활양식과 가옥형태를 관찰할 수 있다.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에는 나무 그늘 아래에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공원 가운데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안트라무로스(Intramuros)


 

[*] 안트라무로스(Intramuros)

마닐라 중심부를 흐르는 파시그강(Pasig River)의 남쪽 제방을 따라 16세기 말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웠다.

 

성벽도시(Walled City)라고도 불리며 성벽의 길이는 약 4.5km, 내부 면적은 약 67.26헥타르이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지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여 1898년 미국에 점령당할 때까지 번성하였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고 1945년 일본군에 대한 미국의 포격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폐허로 변한 성벽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1979년 4월 대통령령을 제정, 인트라무로스를 중요한 사적지와 관광지로 복구하기로 결정하였다.


도시 안에는 거주지·교회·학교·정부청사가 있었고 특히 산티아고 요새(Fort Santiago), 성어거스틴 교회(San Agustín Church), 마닐라 대성당(Manila Cathedral) 등이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마닐라 차이나타운(Manila's Chinatown)


 

[*] 마닐라 차이나타운(Manila's Chinatown)

스페인의 성벽 도시인 인트라무로스(Intramuros)의 반대편에 파시그강(Pasig River) 바로 건너 위치한다.

옹핀 거리(Ongpin Street)에 자리 잡고 있다.

보석상, 시계상, 식품점, 과일상은 물론 온갖 한약재를 취급하는 한약방과 돼지다리, 베이징 오리, 기름에 튀긴 통닭을 내놓는 음식점이 있다.

향내음이 가득한 골동품상, 붉은 지붕의 불교사원과 거리를 항상 수놓고 있는 중국음악의 선율은 차이나타운의 특징이다. 트라이시클(Tricycle)을 이용할 수도 있다.


CCP - 필리핀 문화센터(Cultural Center of the Philippines)

 

[*] CCP - 필리핀 문화센터(Cultural Center of the Philippines)

 

CCP 는 어메이징 쇼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며 필리핀 문화의 산지로 발레·콘서트·연극 등의 예술공연이 열립니다.

국제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죠.

필리핀 전통예술의 기법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있는 필리핀 국제회의장과 예술극장, 코코넛나무를 주재료로 지은 특이한 건축구조의 코코넛궁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국 - 필리핀 전쟁


 

[*] 미국 - 필리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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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미국 전쟁은 1899년에서 1902년까지 미국과 필리핀의 전쟁으로 미국-필리핀 전쟁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요점은 이렇다.

 

1898년 12월 파리조약에서 미국이 필리핀을 2천 만달러에 샀는데, 1899년 아기날도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이에 반발하게된다.

미국은 반항하는 필리핀인 60만명을 학살하게 된다.

 

[ 서론 ]

전쟁은 공식적으로 1902년 7월 4일에 끝났으며, 100여만 명이 넘는 필리핀인들이 죽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필리핀 군인들과 다른 저항군들이 1913년 미국이 통치를 끝낼때까지 미국의 침략에 저항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1901년 필리핀 발랑기가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 배경 ]

1896년 이후 스페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필리핀 사람들은 에밀리오 아기날도 아래 1898년 6월 12일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1898년 12월,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 독립을 돕기위해 스페인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파리조약에서 2,000만 달러로 필리핀을 구매하고,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1899년 1월 1일 아기날도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다음 마로로스 의회를 조직했는데, 미국에서는 8월 14일에 11,000명의 지상군이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해 보내졌다. 미국은 필리핀 침략을 위해 잔혹하고, 극악하게 반항하는 필리핀인 60만명을 학살했다. 이 때, 필리핀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실질적인 필리핀 식민지 총독이 된 것이 아서 맥아더 주니어로 그의 셋째 아들이 더글러스 맥아더이다.

 

[ 과정 ]

미국은 필리핀 측에서는 동맹이 아니라 지배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필리핀 군대와 미국 군대의 관계는 극도로 긴박한 것이었다. 1899년 1월 21일, 필리핀의 제1 공화국이 건국된다.
1899년 2월 4일,산 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가 사살되었다. 최근 필리핀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사건 현장은 현재 마닐라 시내 소시에고 거리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이 사건은 필리핀 측에 의한 마닐라 시내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신문에 말했고, 필리핀 측에 책임을 요구했다.
맥킨리 정부는 아기날도가 이끄는 정부를 범죄자 집단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의회를 통한 정식 개전 통고는 실행되지 않았다. 주된 이유로서 2개 들 수 있다. 첫째, 필리핀측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고,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미국 측이 지배하고 있던 것은 마닐라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스페인 전쟁에 의해 핍팍받던 재정을 염두에 두고, 미국병사의 전쟁 치료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전쟁이 아닌 경찰 활동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2011년 3월 6일 일요일

필리핀에서의 영어 사용 현황


 

[*] 필리핀에서의 영어 사용 현황

image 안녕하세요. 오늘은 필고 회원님들께 필리핀에서 영어를 얼만큼 쓰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필리핀의 공문서는 거의 모두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기관이나 어떤 서류를 접한다고 하더라도 따갈로그(필리핀 표준 말)로 된 영어 문서는 접할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5년 동안 수 없는 문서를 주고 받았지만, 단 한번도 영어가 아닌 적은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 한국 처럼 더빙이 되거나 한국 번역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어가 그대로 나옵니다.

( TV 에서는 더빙이나 서브타이틀이 나오기는 해요. )

 

필리핀 사람들이 할리우드 영화를 보기 위해서, 고등학교 이상 졸업한 10대에서 30대 정도면 무난합니다.

 

필리핀 사람이 고졸 정도면 영어를 구사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보셔도됩니다.

 

물론 간혹 대학을 졸업해도 영어를 잘 못하는 필리핀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필리핀 전 국민들이 영어를 잘한다는것은 결코 아닙니다.

 

배운 사람 또는 평소 TV 에서 영어를 자주 접하고 외국인을 자주 접한 사람은 영어를 구사 할 수 있지만,

그 외 못배우거나 나이가 든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초등학교때부터 영어 교육을 전문적으로 하여 고등 학교에서는 책 자체가 아예 영어로 되어 있으며 수업시간에 영어만으로 수업을 하기도 합니다.

 

필리핀에서 영어는 한국 처럼 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위해서 또는 제 2 국어로서 언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영어를 초등학교 때부터 하지만 필리핀 보단 영어에 노출빈도가 그리 높지가 않습니다.

 

가끔 씩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영어 공부를 위해서 필리핀 여자 친구를 사귀어서 같이 대화를 하며 영어 실력을 늘리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연애는 연애고 공부는 공부입니다. 한 마리의 호랑이도 잡기 힘든데, 두 마리의 호랑이를 한꺼번에 잡겠다니 어불 성실입니다.

 

영어 배우러 왔다가 여자 잘못 사귀어서 따갈로그 배우고 돌아가는 학생 많습니다.

 

물론 영어를 잘 구사하는 여성이나 영어 강사를 사귀어서 매일 매일 특강을 받는 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엘리트 여성이 여러분과 연애도 하고 영어도 가르킬리는 만무합니다.

 

필리핀을 찾는 많은 분들이 여행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고, 또는 영어 공부를 위해서, 영어를 쓰기 위해서 몰에도 가고 시장에도 가고 합니다.

 

이왕 그렇게 하신다면 과감하게 후회 없이 하셔야합니다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어에 대한 자신감과 말문을 트이기 위해서는 필리핀 어학 연수가 최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영어 공부에 집중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면, 가끔씩 한 눈을 팔게 되면, ... 그 결과가 오히려 최악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어학 연수를 가던, 또는 그냥 독방에서 혼자 공부를 하던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하다면 요즘은 오디오, 비디오, 온라인 화상 일대일 수업 등 등 방법이 많으므로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영어 어느정도 하시나요?

 

저랑 영어로 대화 해 보실분?

 

쪽지주세요.

 

필고 thruthesky



2011년 3월 5일 토요일

마닐라 그린힐의 클럽 필리피노


 

[*] 마닐라 그린힐의 클럽 필리피노

그린힐에는 유명한 장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린힐 쇼핑몰에만 왔다 갔다 하면 쉽게 알아 차리기가 어려운 클럽 필리피노가 있습니다.

또는 많은 사람들이 그린힐 쇼핑몰 근처에서 클럽 필리피노가 있으며 꽤 유명하다고만 알았는데, 왜 유명한지 모르는 것 같아서 필고 회원님들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1986 년 2 월에 필리핀에는 대통령 선거가 치뤄집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부정 선거를 통해서 코라존 아키노에 대해서 승리를 하자 1986년 2월 22일 국방위원장과 사령관 등이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 마르코스 정보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코라존 아키노가 진정한 승자임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발표가 있은지 1시간 후 정부의 손 아귀 아래에 있지 않은 유일한 라디오 채널 베리타스를 통해 기독교 추기경이 EDSA 에 모여서 코라존 아키노 및 그 지지자들에게 힘을 싫어 주자고 간청합니다.

그 즉시 필리핀의 신부와 수녀들이 ESDA 거리 모여듭니다.

갑자기 ESDA 거리 한복판에 출현한 신부와 수녀들에 놀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거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유명 가수와 배우들이 관중을 리드하고 온 가족이 나와 즐기며 화합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신부와 수녀가 밤샘 집회를 하고 순식간에 필리핀이 하나가 되는 단결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 1 차 피플파워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리 아키노는 그린힐의 클럽 필리피노에서 상임법관, 라우렐 부통령 및 여러 정치인 앞에서 대통령 취임식에 선서를 하게 됩니다.

이 때 클럽 필리피노 바로 앞에서 부터 EDSA 거리로 이어지는 행렬에서 약 2백만명의 관중들이 이를 축하하고 "바얀 꼬" (나의 고향)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코리 아키노가 대통령 선거 행사 때 입은 노란 색 옷을 많은 관중들이 입었습니다. 현 아키노 대통령의 노란 리본은 그 어머니를 상징하는 심볼이랍니다.

그리고 그가 자주 표현하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펼쳐 보이는 것은 "Laban" 의 L 자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코리 아키노와 피플파워 때 부터 사용 된 것으로 "싸우자, 혁명을 일으키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코리 아키노가 클럽 필리피노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 한 지, 1 시간 후 마르코스 대통령은 말라카냥 궁(청와대나 백악관 같은 곳)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습니다.

 

피플파워로 혁명이 이루어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어떻게 해서 불과 몇 백 명이 안되는 소수의 사람들이 몇 방울의 피 흘림만으로 필리핀을 20년간 독재해 왔는가 이다.

 

 

 


 


필리핀 국제 결혼 시 몇 가지 변경 사항


 

[*] 필리핀 국제 결혼 시 몇 가지 변경 사항   
 


안녕하세요, 필고에서 많은 분들이 결혼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최근 국제 결혼과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이 바뀌어 이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 해 드립니다.

 

단순히 요약을 하면, 필리핀 국제 결혼 조건 더 까다로워 졌다는 것입니다.

 

"국제결혼이 폭증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하고 부적절한 국제결혼이 사회문제화하는 것을 예방하자는 취지"로 법무부에서 관련 법을 개정하였으며 2011 년 3 월 7 일 부터 적용이 됩니다.

 

필리핀(그 외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태국 포함) 사람과 국제 결혼을 할 때 필요한 결혼 사증(F-2)의 발급 기준이 강화된 개정 법안(출입국 관리법)이 2011 년 3 월 7일 부터 적용.

 

첫 째, 결혼 비자(F-2) 의 발급 심사가 대폭 강화


둘 째, 국제 결혼 안내 프로그램 이수


셋 째, 국제 결혼 경험 유,무, 경제적 부양 능력, 범죄 전력, 건강상태 등의 정보를 배우자에게 올바로 제공했는지에 대한 검사


넷 째, 사증 발급이 불허되면 6개월 이내에 재 신청 불가

 


필리핀 여성과 국제 결혼 중매, 알선, 소개, 권유, 회원 등록 등은 인신 매매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절대 비용을 주고 서비스를 받지 마십시오! 인신매매범으로 평생 감옥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필고 www.philgo.com 에 오시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플파워(People Power)


 

[*] 피플파워(People Power)  
 

'민중의 힘'이라는 뜻을 가진 '피플파워(People Power)'는 필리핀에서 발생한 2차례의 시민 혁명을 부르는 말로, 피플파워가 발생할 당시 집권하고 있던 마 르코스 대통령과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모두 물러나게 됐다.

■ 1차 피플파워

1986년 2월25일 독재정권과 부패한 관리, 무능한 정부에 대항해 일어선 피플파워는 페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필리핀의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피플파워 당시 국민들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외쳤고 필리핀 국민과 세계 각국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아키노는 취임 이후 일련의 개혁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민주 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피폐해진 경제와 마르코스 잔당에 의한 7번의 쿠 데타 시도, 기득권계층인 지주들의 압력에 타협 등으로 필리핀의 빈부격차는 마르코스 시절보다 더 극심해졌었다.

그리고 92년 5월 아키노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피델라모스 대통령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
한편, 2002년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필리핀대통령은 1차 피플파워가 발생한 2월25일을 특별국경일로 정했다.

■ 2차 피플파워

2001년 1월 수만명의 군중이 각종 뇌물 스캔들에 휩싸여있던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했고 결국 에스트라다는 사임하였고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이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필리핀에서 쓰기 좋은 핸드폰, 스마트폰


 

[*] 필리핀에서 쓰기 좋은 핸드폰, 스마트폰  
 
 
안녕하세요. 이 글은 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핸드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절대 상품 홍보하려는 것이 아니니 양해를 바랍니다.

 

작년에 삼성 갤럭시 5 를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산 후 정말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아이폰3GS 를 오랜 동안 써 온 터라 지금 현재 갤럭시 5 는 그냥 제 책상 서랍에 쳐 박혀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ㅡㅡ;;

옆집에 똑 같은 갤럭시 5 를 8,700 페소에 팔더라구요.

열이 받아서 제가 샀던 곳에 가서 가격표를 다시 보니, 프로모로 해서 9,190 페에 파네요. 아 열받아, 저는 첨에 12,490 페소를 주고 샀거든요. 제가 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옆집 가격을 봤는데, 약 3천 8백 페소가 차이가 나니 열이 받지 않겠어요...

 

그래서 갤럭시5 아래 그림 나오죠? 저거 휴지통에 버릴려구요. (농담이구요. 그냥 아는 사람 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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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산 곳. 이전에 프로모 업을 때, 12,490 페소에 샀음. )

 

약 일주일 후... 옆집에는 8,700 페소에 팜. 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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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갤럭시 S 와 똑 같은 디자인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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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흰색 테두리 보이죠? Galaxy Ace 입니다. 옆에는 Galaxy Mini 가 있구요.

 

갤럭시 S 와 같은 갤럭시 시리즈로 생각이 됩니다.

 

갤럭시 Ace 는 액정도 크고 디자인도 뛰어난 편입니다. 사양에서 차이가 보이겠지만 그 외의 분에서는 갤럭시 S 나 차이가 없지 싶습니다.

 

한국돈으로 약 37만원 정도하네요.

 

컴퓨터로 홈페이지 글이나 메일 정도 관리를 하는 업무를 보는 분이면 정말 컴퓨터 대신 저런 거 하나 사서 들고 다녀도 좋겠습니다.

 

제가 잠시 써 본 갤럭시 5 는 아주 훌륭한 스마트 폰 모델이었습니다.

 

갤럭시 Ace ... 구매가 당기네요.

 

 

 


 


 


 
 
 
 
 


 


중국과 필리핀의 영토 분쟁


 

[*] 중국과 필리핀의 영토 분쟁  
 

요즘 필고에서 중국과 필리핀이 영토 분쟁 중이라는 글들이 올라와서 한번 살펴봅니다.

 
2002 년 11 월 중국이 동남아국가연한(아세안)과 분쟁 방지에 합의한지 약 7년 만(2009년 분쟁이 재 시작)에 다시 중국과 필리핀의 영토 분쟁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영토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은 아래의 그림에서 보이는 남중국해에 속하는 황옌다오 입니다. 필리핀 이름으로는 스카버러 라고 합니다.

 

중국이 분쟁을 다시 시작하자 미국이 필리핀 편을 들어서 함정을 보냈다고 합니다.

 

남중국해는 중국의 각종 수출입을 하는 통로이며 무엇보다 천연자원(석유, 가스 등)이 많이 묻혀 있는 지리라고 합니다.

 

사실 이 지역의 영토 분쟁은 2009 년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아로요 대통령이 황옌다오를 필리핀 영토로 편입하자 분쟁이 시작되었죠.

 

중국 대사가 항의를 하고 중국 정부가 4600 톤 급 어정을 출력하는 등 실력 행사에 들어가자 필리핀이 미국에 지원 요청을 해서 미군 군함이 급파 되기도 했었습니다.

 

미국이 필리핀의 편을 들어 중국을 견제하고자 한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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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4일 금요일

국제결혼 절차 안내


 

[*] 국제결혼 절차 안내   
 

국제결혼 절차 안내

1. 결혼비자(F-2-1)신청에 앞서 국제결혼을 원하는 한국인은 미혼증명서(Legal Capacity to Contract Marriage) 발급 전에 영사면담을 실시하여 국제결혼에 필요한 정보를 사전에 제공 받습니다
※ 결혼비자 신청 안내

    * 필리핀 결혼법에는 혼인관서인 시청에 결혼허가를 신청하면 일반인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시청 게시판에 10일간 이해관계자의 이의제기 기간을 두어 그 결혼이 문제가 없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동 결혼 사실을 공고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영사관에서는 한국인 결혼 신청자가 필리핀 배우자의 성장배경, 가족사항,  성격, 결혼의 진정성 등을 확인할 기회를 주고 필리핀인 배우자는 상대 한국인의 성격, 성실성 등 국제결혼 능력자인지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기간  을 주어 성공한 국제결혼을 유도하기 위해서 2008.7.1부터 주재국에서 정하고   있는 공고기간 10일이상 체류자에 한하여 결혼비자(F-21) 신청을 접수합니다. 

   ▣ 국제결혼 영사면담 접수시간 : 오전 09:00-11:00시(비자 1, 2 창구)
       * 면담시간 오후 2:30분 (2시까지 영사관에 오셔서 대기) 
       * 면담은 한국인과 필리핀 배우자와 함께 받습니다.    

   ▣ 국제결혼 영사면담 시 제출서류
      ※국제결혼 면담양식(4종류)작성(영사관 민원실에 비치)
       1. 결혼인터뷰 기초자료 1부
       2. 언약서(SWORN STATEMENT) 1부
       3. 진술서(AFFIDAVIT) 1부
       4. 미혼증명서 발급 신청서 1부
      ※가져오실 서류     
       1. 한국인 여권원본 및 여권앞면(사진면) 복사 2부
       2. 한국인 혼인관계증명서 원본 및 복사 1부
       3. 필리핀 배우자 여권앞면(사진면) 복사 1부
          * 여권이 없을 경우 필리핀 NSO출생증명서 또는 ID 원본 및 복사 1부 
   ▣ 영사면담을 마치신 후 공증창구에 100페소를 내시고
       미혼증명서(Legal Capacity to Contract Marriage)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2. 필리핀시청 결혼 절차 안내

   1. 미 혼증명서(Legal Capacity to Contract Marriage)를 가지고 필리핀 배우자 거주지 시청에 결혼허가서 제출 
   2. 필 리핀은 중혼 및 이혼이 허용되지 않으므로 사전에 결혼 적격여부 심사(시청 게시판 10일간 공고)를 거친 후 시청발행 결혼허가증(Marriage Licence)을 수령하여 결혼식 거행
   3. 최종 통계청 발행 NSO 결혼증명서 수령
   4. NSO 결혼증명서 원본과 한글번역문을 가지고 한국호적관서(3일소요)에 혼인신고
          * 공증창구에 NSO 결혼증명서 영사확인 불필요
          * 단, 영사관 공증창구에 혼인신고서 접수하실 경우 1-2개월 소요
   5. 한국 호적관서에 혼인신고를 마친 혼인관계증명서 원본을 필리핀 배우자에게 송부
   6. 필리핀 배우자 영사관 비자 1,2 창구에 국제결혼비자 신청

▣ 국제결혼비자(F-21)신청 시 구비서류
   - 비자 신청서 1부
   - 배우자 여권원본 및 여권앞면(사진면) 복사 1부
   - 배우자 여권용(3.5x4.5) 사진 1매  
   - 국내혼인신고를 마친 혼인관계증명서(한글본) 원본 1부
   - NSO 결혼증명서 원본 1부
   - NBI 신원조회서 또는 Police Clearance 사본 1부
   - CFO 교육이수증 원본 및 복사 1부
   - 한국인 배우자의 초청장 1부
     ▲ 수수료 : 1,500페소
     ▲ 소요일 : WORKING-DAY 5일 (심사결과에 따라 WORKING-DAY 6일 이상 소요될 수도 있음.)
▣ 해당사항 추가 구비서류
   (1) 결혼중개업체를 통해서 만난 경우
- 국제결혼등록증 복사 1부
       - 보증보험증권 복사 1부
- 개별 계약서 복사 1부

   (2) 친인척의 소개로 만난 경우
- 친인척의 신분증 복사 1부
- 친인척의 NSO 필리핀 결혼증명서 복사 1부

   (3) 지인의 소개로 만난 경우
- 지인의 여권 또는 한국신분증 복사 1부

CFO 교육(Commission on Filipinos Overseas : 필리핀 해외동포위원회)

    CFO 홈페이지: http://smef-cow-phil.org
    CFO 주소: Good Shepherd Convent, 1043 Aurora Boulevard cor. Katipunan, 1108 Quezon city
    CFO TEL: 마닐라 02-913-6439, 911-1814 / 세부 032-235-3745~6

    필리핀 외교부 산하 CFO에서는 외국인과 결혼하는 필리핀인에 대해 출국 전 CFO교육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고 있으며, 필리핀인 배우자가 거주 자격(F-21)의 비자로 출국하고자 할 경우 CFO 교육이수증이 없으면 공항이민국에서 출국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배우자이름이 등재된 “혼인관계증명서”를 영문번역 하신 후 영사관에서 공증을 받아 CFO 기관에 제출하셔야 합니다. 

    CFO 교육을 받기 전에 불가피한 사유로 한국을 일시적으로 방문하고자 하는 경우 그 사유가 충분히 소명되면 예외적으로 단기 관광비자(C-3)를 신청할 수 있으나 이 경우는 필리핀공항 출국시 왕복항공권을 준비하여야 하며, 이 경우에 있어서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 필리핀을 다녀가고자 할 때 공항에서 또 다시 CFO 교육이수 문제로 불편을 겪게 될 우려가 크므로, 사전에 CFO 교육을 받고 배우자 자격의 결혼비자(F-21)를 발급 받아 출국하시기 바랍니다.

    결 혼비자를 받아 출국하는 경우, 편도 항공권으로 출국이 가능합니다.

국제결혼 주의사항 (결혼중개행위 불법)

    * 필리핀은 영리목적의 결혼중개 행위는 물론 결혼중개 업체의 설립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위반 시 중한범죄(인신매매범)로 분류되어 처벌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Anti Mail Order Bride Law)
    * 그 내용을 보면 개인, 단체, 법인 등이 광고나 뉴스, 팜플렛 등으로 결혼을 알선하고 중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범죄로 적발되어 기소될 경우 6년 이상 8년 이하의 징역 및 8천페소 이상 2만페소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며, 외국인이 관련된 경우 이러한 형벌을 받은 후 추방되어 영구입국이 금지되므로 중개자를 이용하여 결혼을 하는 경우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맞선과 같은 일반적인 결혼소개 행위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 그러나 필리핀 현지에서 국제결혼 맞선을 보기 위해 국제결혼을 원하는 한국인이 호텔 및 맞선장소에 나갔다가 필리핀 NBI(범죄수사국)직원에게 적발되거나 필리핀인들로부터 불법행위를 무마해준다는 핑계로 금품을 요구받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불법 결혼중개 행위로 인한 피해가 없도록 결혼목적으로 필리핀 방문하신 우리 국민들께서는 각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주 필리핀 대사관 -


 


필리핀 여성과 국제 결혼 중매, 알선, 소개, 권유, 회원 등록 등은 인신 매매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절대 비용을 주고 서비스를 받지 마십시오! 인신매매범으로 평생 감옥에서 지낼 수 있습니다.
 

필고 www.philgo.com 에 오시면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필리핀 참전기념비


 

[*] 6.25 전쟁에 참전한 필리핀 참전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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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에 참전한 필리핀 지 상군 1대대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74년 10 월 2일에 건립되었다. 필리핀군은 1950년 9월 19일에 한국에 와서 5년 뒤에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하고 남산미술원장 이 일영이 제작하였다. 탑신 높이 17m, 탑신 둘레 15m, 탑 기단 높이 4.5m, 탑기단 둘레 27m이다. 군상이 부조로 세겨져 있다.

 

 


필리핀 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 필리핀 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of the Philippines ]  
 

1901년 자연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마닐 라의 변천과정을 비롯하여 필 리핀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시대별, 지역별로 살펴볼 수 있는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현 재의 건물은 옛 필리핀 상원의회의 건물로 1918년 미국의 건축가 다니 엘 번햄(Daniel Burnham)이 설계하였다. 박물관은 마닐라 시내의 리잘공원(Rizal Park) 근처 부르고스거리(Brugos St.)에 있다. 필리핀의 역사적 자료를 많이 전시하고 있어 '필리핀 사람들의 박물관(Museum of the Filipino Peoples)'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필리핀에서 발굴된 선사 시대의 유골과 필리핀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유물, 기원 전 9~8세기경의 선박, 이 슬람 문화와 관계된 자료, 민속 공예품, 마닐라의 중 세도시의 모습과 당시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다양한 유물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중세 해상무역이 활발하던 시기인 1600년대 침몰한 스페인 갈레온 선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칼라타칸과 타본(Tabon)의 동굴에서 나온 호 모사피엔스 유골과 후안 루나(Juan Luna)의 그림 'Spoliarium'을 포함하여 필리핀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필리핀 내전


 

[*] 필리핀 내전  
 

필리핀 내전은 종교와 사상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공산계 반군과 회교도 분리집단에 의해 무장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공산계 반군의 대표격은 신인민군(NPA)으로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필리핀 영토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 정부군의 군사압력,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퇴조, 지도부의 노령화 등이 결합되어 NPA는 최근 약화되기도 했으나, 2002년 8월 미국에 의해 필리핀공산당(CPP)과 함께 해외 테러집단으로 지정되었다.

한편 13세기경 필리핀에 유입된 이슬람교는 15세기에 민다 나오 지역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1521년부터 350년간의 스페 인 지배기간을 통해 필리핀 전역이 카톨릭화 되었고,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1898년, 이슬람교도 거 주 지역으로 비이슬람교도들을 강제이주 시킴으로써 갈등이 시작되었다.

또한 국민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카톨리계가 1948년 독립 이후 권력을 장악하면서 이슬람계를 차별하고 학대하였다.

그러던 중 1971년 마르코스 정부가 모로 족을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과 이슬람교도간의 갈등은 내전수준으로 확대되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76년 남부의 13개주의 자치를 허용하는 내용의 트리폴리 협정이 체결되면서 휴전이 성립되기도 했으나 지난 24년동안 계속된 반군의 무력항쟁으로 모두 15만명이 사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96년 8월에도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의 '미수아리' 의장을 남필리핀 지역 주지사 임명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카톨릭계 지역주민의 반발과 강경파인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거부로 내전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반군은 크게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장하는 '아부 사이야프'와 최대 세력인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급진세력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등 3개로 나눠져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 등 이슬람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남부 민다나오섬을 기반으로 반정부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아부 사이야프가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연루된 것으로 보고, 아부 사이야프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필리핀의 자연 환경


 

[*] 필리핀의 자연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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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국토는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섬은 이름 없는 암초이거나 산호초이고, 사람이 정착하고 있는 섬은 880개 정도이다. 그 가운데 루손 섬[島]과 민다 나오섬[島]이 가장 크고, 그 밖의 주요 섬으로는 양대 섬 사이에 있는 비 사얀 제도의 7개섬(사마르, 파나이, 레이테, 세부, 보홀, 마스바테, 네그로스) 및 민도로, 팔 라완 섬이 있다.

 

지형은 필리핀의 최고봉인 아 포산(2,954m)을 비롯하여 마욘, 탈 등 여러 개의 화산을 가진 산지와 미국의 2배가 넘는 복잡한 해 안선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 환 태평양 화산대와 환태평양 지진대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화산이 많고 지진이 잦다. 또 해안지대에는 곳곳에 산호초가 발달해 있고, 태 평양의 필리핀 해구(海溝) 에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연(海淵)의 하나인 케이프존슨과 엠 덴 해연이 있다.

 

북위 4∼21℃의 열대권에 위치하므로 지역, 시기에 따른 기온의 교차가 적고, 전국을 통틀어 연평균기온은 27℃ 정도이다. 기후에 변화를 주는 요인은 주로 강우인데 강우 형태에 따라 4∼7개의 기후형으로 구분된다.


 
 
 


필리핀의 사회


 

[*] 필리핀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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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민족적 통일을 가져다준 것은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지 지배체제였다. 따라서 토착문화 위에 에스파냐와 미 국 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박혀 특이한 복합문화가 성립되었다. 특히 도시인, 그 중에서도 엘리트층의 생활이나 행동양식은 분명히 서구적이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전파한 로마가톨릭은 필리핀을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었다. 종파별로는 로마가톨릭 83%에 프 로테스탄트와 여러 토착 종파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92%가 그리스도교도이다. 또 연중행사 등과 더불어 플라자(광장)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도시의 생활관습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짙게 풍긴다.

한편 각 바랑가이(바리오:최소 행정단위)의 수호 성인을 받드는 축제는 농민 생활의 중요한 단면 가운데 하나이다. 이슬람교분리주의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영향은 경제생활의 변화라든지 의회정치의 정착 등에서뿐만 아니라 영어의 사용이나 교육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엘리트층의 사상 형성의 저변에는 미국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다. 오늘날 영어 사용 인구는 45%이며 독립 이래 국어가 된 필 리핀어에 버금가는 보급 상태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한 이래 교육도 널리 보급되었다.

교 육 수준은 높은 편으로, 초등교육 기관 중 최초의 2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주로 영어를 사용한다. 초등교육과 중학교 과정은 의무교육제이며, 문맹률은 7%(2007) 정도이다. 미국의 대학, 대학원으로 유학하는 엘리트층을 흔히 볼 수 있으며, 미국과 필리핀 간의 교수, 연구원의 교류도 많은 편이다.

필리핀 국민들은 가톨릭을 매개로 아모르 프로프리오(amor proprio)라는 자부심(self-esteem)과 상당히 느슨한 인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저지 대에 거주하며 가톨릭을 신봉하는 필리피노들은 소가 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 연집단을 시작으로 동심원적 인적 연대관계를 발전시켰다. 이들의 인적관계에 의하면 한 사람이 다 른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되면 이는 곧 채무의식으로 발전하여 은혜를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호혜성의 원칙을 인간관계의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상대방과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있거나 인간적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


 
   


 


필리핀 민족 동맹


 

[*] 필리핀 민족 동맹  
 

필리핀이 에 스파냐로부터 독립하는 데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소설가이자, 필리핀 개 혁주의의 대변자 역할을 한 사상가 리살(Jose' Rizal)이 1892년 조직하였다. 리살은 1882년 에스파냐 마드리드에 유학해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활발한 문필활동을 하면서 300여 년에 걸친 에스파냐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892년 귀국과 동시에 온 건파 민족주의 단체를 결성하고 사회개혁운동을 펼쳤는데, 이 단체가 필리핀민족동맹이다. 리살은 이 단체에서 활약하면서 민족적 일체성 강화와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리살은 그 뒤 A.보니 파시오가 조직한 민족주의 비밀결사인 카티푸난(Katipunan)이 일으킨 폭동에 참가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896년 12월 공개 처형되었다.

 

그러나 리살이 죽은 뒤에도 필리핀민족동맹은 미국 -스페인전쟁 당시 미국을 도와 미국이 승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필리핀의 경제


 

[*] 필리핀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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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풍부한 광물, 비옥한 토지 등 천 연자원과 해양자원이 풍부한 국가이다. 노동인구의 40% 이상이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로 플 랜테이션(Plantation) 농업이 유명하다. 대표적인 작물로는 쌀, 옥수수, 바나나, 설탕과 사탕수수, 카 사바 등이 있으며 마(麻) 생산은 세계 1위이다. 그러나 일부 계층만이 부(富)를 독식하는 사회 구조로 인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빈곤과 채무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필리핀은 독립이후 1970년대까지 아 시아의 경제를 이끄는 경제 선도국가이자 동남 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창설한 주도한 국가였다. 하지만 마 르코스 정권하에서 정경유착이 심화되면서 경제구조가 왜곡화 되었고 비효 율적인 경제정책이 수립되었다.

1950년대 필리핀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제조업 분야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1950년대 말 제조업의 성장률이 둔화되자 정부는 달러에 대한 페소(peso)화를 평 가절하하여 수입 및 외환통제를 해제하였다. 그 결과 1963년부터 경기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르코스가 집권한 첫 시기에는 적극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제조업 분야에 민간자본의 투자를 촉진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상당기간 성장을 지속하였다.

1970년대 들어 필리핀 경제는 황폐화지기 시작했다. 재선을 염두해 둔 마르코스는 방만한 지출로 재정 위기를 자초하였고, 1972년 계엄 령 선포 후 자신의 측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국가주도의 경제발전계획으로 전환했다. 신 사회(New Society)의 창조를 주장하며 선포한 계엄령 이후 5년간 각종 투자 인센티브가 제공되고, 수출촉진지역이 설치되는 등 미국과 국제 기구로부터의 지지에 힘입어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개발에 투입될 자금이 대부분 공정대회차입의 형태로 마련되어 대외 채무액이 겉잡을 수 없이 증가하였고, 이 차관조차도 친 마르코스 국영기업으로 유입되어 경제 실무자들의 부패를 조장했다. 설 상가상으로 1979년 제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해 세계 경제가 침체되자 필리핀의 경상 수지 적자는 심화되었다. 1983년 아키노 사후 필리핀 정부는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는데 불안해진 정정을 틈타 다량의 외화가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급기야 1983년 10월, 필리핀 정부는 모라 토리움(moratorium)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이주하였다.

1986년 대통령직에 오른 아키노는 국영 및 정부 통제 기업을 사유화하는 경제 자 유화 정책을 실시하고, 시장 논리에 입각한 세제 개편과 무역과 투자제도를 자율화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빈곤을 퇴치하고 높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제도적 개혁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과제는 경제개발 6개년계획(1987~1992)을 통해 다소 해갈되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외채증가와 기업 분야의 부채를 정부가 담당하면서 재정적자는 심화되었다. 더군다나 개혁에 반대하는 군부가 7차례에 걸친 쿠 데타를 일으켰고, 1990년대에 들어 발생한 극심한 가뭄과 화산폭발 등 자연재해로 인해 시국이 불안해 졌다.

1992 년 취임한 라모스 대통령은 2000년까지 모국(母國)을 신 흥공업국으로 진입시킨다는 목표 하에 '필리핀 2000 비전'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제개발 6개년 계획(1993~1998)을 시행하였다. 이 계획의 주요 목표는 국민의 빈곤 경감, 사회적 평등과 지속적인 경제발전이었다.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재정 위기로 인해 페소는 급격하게 평가절하 되어 국 제시장에서 필리핀 제품의 구매력이 감소되었고, 국내적으로 산업 전반에 걸친 불경 기가 이어졌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발생한 엘리뇨 현상, 인 도네시아 연무, 가뭄 등 각종 자연재해는 필리핀 경제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필리핀의 문화


 

[*] 필리핀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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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다양한 종족과 종교뿐만 아니라 기층 문화에 에스파냐, 미 국 문화까지 혼합된 복합사회이다. 그러므로 필리핀 사회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발견되는 문화 요소는 정실주의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문화의 근원은 핵 가족 제도에서 나오며, 가톨릭적 종교관이 뚜렷해 낙태나 이혼은 부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가 톨릭교 전파 이전에는 정령신이 존재했다. 타갈로그어로 최고의 신을 가리키는 바타라(Bathala)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외에도 각 지방과 다양한 신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산천초목을 상징한다.

 

미인이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으로 흰 피부이다. 여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민간요법을 따르고 있는데, 이는 에스파냐와 미국 식민 당국이 흰 여성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리핀 북부 산지에서는 소수종족들이 직물업에 능하며, 에스파냐가 진출하기 전 도자기 제작이 흥했다. 미술 작품은 에스파냐 식민 시기 이후부터 대중 화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데미 안 도밍고는 필리핀 회화의 아버지로 불렸고, 제 2차 세계대전 후 초현실주의화파가 나타났으며 주요 화가는 빈센 트 마난 살라, 헤르난도 오 캄포, 빅토르 에다데스 등이 있다. 1995년 사망한 요세요야는 추상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각은 19세기 중반에 크게 발전하였으며 보나파치오 기념비로 유명한 갈레르모 톨렌티노(1890~1976)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현대 조각에서는 톨렌티노의 제자인 나롤레옹 아부에바가 유명하다.

 

대나무를 엇갈아 가며 흥겨운 리듬에 춤을 추는 대나무 춤은 필리핀의 가장 유명한 전통 춤공연이다. 십자가 모양으로 대나무를 엇갈아 놓고 댄서가 중앙에서 대나무가 움직일 때마다 춤을 춘다.

 


필리핀의 정치


 

[*]  필리핀의 정치 
 
 

1987년 헌법에 따라 필리핀의 국가수반은 대통령이다. 행 정부의 수반이기도 한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며 재임 기간은 6년 단임제로 6월 13일부터 임기가 시작된다. 부통령도 대통령과 같은 자격이어야 하며 국회의원들에 의해 선출되는데 대통령과 달리 재임이 보장된다. 대통령은 임명위원회(Commission on Appointments)의 동의를 얻어 행정부처의 수반과 대사, 각 행정 각료와 대령 이상의 고위 군장교의 임명권과 지명권을 가지는 동시에 행정부와 산하 부처를 통제할 수 있다. 유사시 대통령은 60일을 초과하지 않는 기일 내에서 국군총사령관이 될 수 있으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신보호영장제도를 중지할 수 있다.

필리핀의 행정부서는 총 21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료의 수가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교체될 때마다 각료의 수도 증감한다. 필리핀은 미국식 의회제도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이 대통령으로 집중되어 있다. 대통령제 하 내각의 부처는 원칙적으로는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대통령의 정치적 관심 분야에 따라 특정 부서 순으로 서열화 되는 경향이 있다.

필 리핀의 입법부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의원은 6년 임기에 중임이 가능하며 최대 24명까지 선출할 수 있고, 2004년 현재 23명이 지명되어 있다. 1987년 헌법에 의하면 상원의 피선거인 자격은 필리핀 출생으로 35세 이상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로서 선거일 기준 2년 이상 국내에서 거주하여야 한다. 2004년 5월 12명의 상원의원이 선출되었다. 하원의원은 3년 임기로 3회 이상 연임할 수 없다. 정 족수는 250석을 초과할 수 없는데 단일 선거 구에서 212명이 선출되고, 정당명부제에 따라 24석이 정당별로 할당된다. 하원 의원의 피선거인 자격은 필리핀 출생으로 25세 이상의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로서 선거일 기준 1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여야 한다. 양원의 공석이 발생했을 경우 남은 임기에 제한하여 새로운 의원을 선출해야 한다. 대통령은 필요시 언제든지 임 시 국회를 소집할 수 있다.

상원은 상원 의장과 대변인을 선출하고, 하원 정족수 1/3이상으로 발의된 대통령, 부통령, 대법원 재 판관, 헌법위원회 위원, 옴부즈맨에 대한 탄핵을 단독으로 심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다. 하원은 정부 예산을 결정하는 일반세출법(General Appropriations Law)을 단독으로 발의할 수 있기 때문에 양원 간의 견 제와 균형의 원리는 존재한다.

필리핀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은 정 당정치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정치권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소수의 엘 리트가 정권 변화와 관계없이 자신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인물 중심’의 정당체계가 작동한다. 따라서 정강이나 정책 중심의 '정책 정당'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정치인들은 정당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선거를 전후하여 정당 교체가 빈번히 발생한다. 현재 집권하고 있는 민족주의민중연합은 라 모스 전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두고 있으며, 기타 레포르마(Reporma: 민주개혁당), 프롬디(Promdi: 지역개발당), 민주행동당(Aksyon Demokratiko) 등 소수 엘리트의 카 리스마에 바탕을 둔 군소 정당들과 연합하고 있다. 대표적인 야당으로는 필리핀민주투쟁당과 자 유당 등이 있다.

필리핀 군대는 1898년 아 기날도(Emilio Aguinaldo)에 의한 혁명정부가 스페 인에 대항하여 필리핀 군대를 조직한 사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현재 필리핀군(Armed Forces of the Philippines)은 미국의 식민지 시기인 1935년 12월 21일 국방법으로 알려진 연방법(Commonwelath Act) 제 1호에 의거 필리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창군되었고, 육군·해군·공군·경찰(constabulary) 등 총 4개 분야를 총괄하여 현재의 명칭으로 1950년 12월 23일 확정되었다. 2005년 3월 현재 총 병력은 9만 8천명이며 육군 6만 1천명, 해군 2만 2천명, 공군 1만 5천명이다. 현역은 지원제, 예비군은 대학 졸업자에 국한한 의무군 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2004년 국방 비는 정부예산안의 8%인 7억 9천만 달러를 지출했다.


 
 
 
 
 


필리핀 위원회 - 한 때 돈 많았던 필리핀이 스페인에 돈을 빌려주기 위한 회의


 

[*] 필리핀 위원회 - 한 때 돈 많았던 필리핀이 스페인에 돈을 빌려주기 위한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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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이베리아 반도 밖으로 몰아냈고, 이듬해 페르디난드 7세는 스페인 왕좌를 수복했다.

그간의 전쟁으로 스페인 왕실은 재정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페르디난드 7세는 1815년 3월 30일 재정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필리핀 척식회사 평의회를 소집했다. 필리핀 척식회사는 카를로스 3세 시절 카바루스가 설립한 식민지 지배기관으로, ‘필리핀 위원회’라고도 한다.

필리핀 위원회는 페르디난드 7세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기로 결정하고 이 특별회의를 기록하는 그림을 프란시스코 고야에게 맡겼다.

그 후에도 왕실은 거듭해서 필리핀 위원회에 자금대여를 요청했는데, 빌려간 돈을 갚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손을 벌리는 왕실에 대한 필리핀 위원회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필리핀 위원회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다를 바 없는 왕실의 재정지원 요구를 외면하게 되자, 페르디난드 7세는 1820년 이 회사의 자산을 몰수해버리고 만다.

 


2011년 3월 1일 화요일

필리핀의 주민


 

[*]필리핀의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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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국민을 흔히 필리피노(Fhilippino)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말레이 인종에 속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의 결과 약간 변형된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 아 시아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빙하 기에 동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아 에타족(族:니 그로이드에 속함)의 조상(인류학상으로는 프로토 말레 이인), 둘째, 대륙에서 분리되고 난 뒤 인 도네시아, 중국의 화남(華南), 인 도차이나 방면에서 바다를 건너온 산지 미개발 부족의 조상(인류학상 인도네시안 A.B), 끝으로 BC 2~3세기부터 14∼15세기 사이에 인도네시아 방면에서 건너온 문명화한 여러 평지 부족(오늘날 필리핀인의 대부분)의 조상(인류학상 말레이인)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고립된 정착 생활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여러 부족 사이에 100여 개의 언어 및 방언이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언어는 타갈로그, 일로코, 팜팡고, 비콜, 세부아노, 일리가이논(일롱고), 와라이와라이(사마르-레이테), 마긴다나오, 팡가시난 등 말라야-폴리네시아어파(語派)의 9자매어(姉妹語)이다. 1946년 독립 이후 타 갈로그어(語)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語)가 국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도 공용 어로 사용되고 있다. 에 스파냐 문화가 파급되기 이전부터 힌두, 이 슬람, 중국 문화가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당시에는 변경지대에 불과하였던 이 나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따라서 여러 부족이 할거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통일을 이루게 한 것은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지 지배였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산스 크리트나 아랍 문자에서 유래한 자모(字母) 를 가지고 있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민다나오섬에서 루손 섬에 이르기까지 이슬람교(敎)가 전파되었다. 16세기에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정복된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이 남부로 쫓겨나기는 하였으나 이슬람교도(모로 족)들은 외국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생활과 문화를 고수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국가적 통일을 저해하는 소 수민족 문제의 핵심이 되어 있다.

한편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된 뒤에는 중국인들의 유입이 본격화하여 상인, 기술자로서 식민지 경제에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추방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지켜왔다. 더욱이 필리핀 사람들과 활발한 혼혈이 이루어져 필리핀의 유력한 경제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그들의 후예이다. 에스파냐 사람들 역시 식민지 지배와 포교 과정에서 원주민 상류층과의 혼혈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이 밖에 미국 인을 비롯한 외국인들과의 혼혈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메스 티소(혼혈아)를 탄생시킴으로써 필리핀 사회에 독특한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도 아시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것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2007년 추정 인구는 약 9,100만이며 수도 마닐라에는 1,000만명 가까이 거주한다. 마닐라가 있는 다바 오(Davao: 약속의 땅)주의 인구는 115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관광 도시로 유명한 세부(Cebu: 남부 여왕의 도시)에는 330만 명이 거주한다.


 


 


 
 
 
 
 


 


필리핀의 역사


 

[*]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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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의 시작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을 만한 기록은 없다. 특히 스페 인을 비롯한 대외세력이 필리핀에 침투하기 이전의 역사는 흔히‘고대문명’으로 통칭되고 있다. 이 시기의 기본적 통치 형태는 ‘바랑가이(barangay)'라는 족장 지배 체제였다. 바랑가이는 대개 30~100가구 정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닐라(Manila), 세부(Cebu) 등과 같은 지역에서는 2,000명 이상이 포함된 바랑가이도 존재했다고 한다. 바랑가이에는 독자적 지배자인 다투(datu)가 존재했다. 다투는 최고의 행정권자이자 입법가, 재판관, 군사지배자로서 대부분의 권한을 독식했으나 마을의 중 대사를 결정할 일이 발생하면 마을 원로들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고대시기 필리핀에는 무역을 통해 이 슬람이 전파되었고, 참파(Champa)와 교류하였으며 송(宋)과 명(明)의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정화(鄭和) 의 원정당시 명나라는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3차례에 걸쳐 필리핀을 정벌하기도 했다. 남부 민다 나오(Mindanao) 지역은 14세기부터 이슬람 왕국이 성립되어 이 지역의 무역을 통제하였다.

16 세기에 접어들면서 필리핀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1521년 필리핀을 발견했다. 마젤란은 세부 지역의 막딴(Mactan) 촌장인 라푸라푸(Lapu-Lapu)와 벌인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마젤란 사후 스페인은 필리핀이 무역 기지로서 최적의 지역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식민화 작업에 착수했다.

19세기에 들어 필리핀의 결집된 민 족주의는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을 외부로 표출하였는데 이는 스페인의 대 식민지 정책이 유화적으로 변화한 틈을 탄 것이었다. 호 세 리살(Jose P. Rizal)이 대표적 인물로 그는 1892년 필 리핀민족동맹(La Liga Filipina)을 결성하여 사회개혁을 시도하였다가 까띠푸난(Katipunan)이 일으킨 폭동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1896년 식민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1898년 필리핀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게 양도하였다. 새로운 식민지배 하 필리핀의 정치 및 행정체계는 급속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영어를 널리 사용하도록 교육 체계를 개선하고 전국에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를 세웠다. 이는 스페인이 종교를 통해 꾀하려했던 민족정신 말살 정책과 유사한 것으로 민족의식을 희석시키기 위해 교육을 장려한 것이었다.

1941년 일본군은 예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고, 몇 시간 후 필리핀 곳곳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1월 일본군이 마닐라를 완전히 점령하였고 1945년까지 필리핀은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일본은 대 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내세워 백인의 아시아 지배를 종식해야한다는 명분으로 필리핀 통치를 정당화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 7월 4일 필리핀은 4세기 간에 걸친 외세의 시달림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 독립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이 지속된 가운데 막사 이사이(Ramon Magsaysy, 재임 1953~1957)는 일본 식민지 시기부터 싹트 기 시작한 공산주의 세력을 억제하였는데 특히 후크발랍(Hukbalahap, 抗日人民軍)을 와해시키고 민주 주의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이 후원하는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마 르코스가 등장하면서 폐기된 것처럼 보였다. 1965년 11월 실시된 대 통령 선거에서 민족당 출신의 마르코스 상원 의장은 자 유당의 마까파갈(Diosdado Macapagal)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첫 임기(1965~1969) 동안 마르코스는 효율적 세제운영과 대외차관 유치로 국가 재정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사회 간접자본을 건설하는 한편 각종 밀수 및 범죄자와 공산세력을 소탕하였다. 1969년부터 세계 경제가 하강 국면으로 치달음에 따라 필 리핀의 경제도 위기를 맞았다. 1972년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년간 독재의 길을 걷게 된다.

마르코스의 정적인 베닝요 아키노(Beningo Aquino Jr.)가 1983년 암살당하자 대중들은 마르코스의 하야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1986년 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반정부세력들은 선거 관리위원회를 장악한 마르코스 진영이 선거부정을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결국 군부마저도 마르코스에게 등을 돌려 군사 시위에 참여했고, 마르코스는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베닝요 아키노의 미망인인 코 라손 아키노(Corazon C. Aquino)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그는1987년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 관료제를 마르코스 체제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7명의 후보가 나선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라모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그의 뒤를 이어 에 스트라다가 199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에랍’이라고 칭해지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영화배우 출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대변인으로 전 대통령들의 과업을 이어 받아 개혁을 이어가겠노라고 약속하였으나 민생을 돌보지 않고 정실주의(cronyism)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민다나오의 모로(Moro) 무슬림을 자극하여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고, 불법 도박을 묵인하기도 했다. 결국 2000년 11월 도박 혐의로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탄핵을 당한 대통령으로 기록되면서 불명예 퇴진하였다.